PLACE DETAIL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문화예술, 역사체험 · 체험시설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성인·일반 · 경상남도 밀양시

체험 장소 소개

독립운동의 성지 경남 밀양! 독립운동 정신이 살아있는 본향! 충절의 성지에서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 이용안내 관람시간 입장시간 09:00~17:00 관람시간 09:00~18:00 * 휴관일 - 1월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매주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 입장요금 - 유료 (박물관 및 화석전시관 통합입장권) 어 른 : 1,000원(20인이상 단체 700원) 청소년 : 700원(20인이상 단체 500원) 어린이 : 500원 (20인이상 단체 300원) 무료입장 : 국가유공자, 경로,경남 다누리카드 소지자와 그 가족등.. ▶ 전시안내 * 추모의 공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윈스턴 처칠), 단제 신채호 독일 나치의 유태인 학살 장소인 아우슈비츠에 쓰인 경고문을 아시나요?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다는 것디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말이지만, 알지 못해 잊을 것조차 없는 우리민족에게는 이 말마저도 부끄러운 말입니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 선열의 불꽃 및 흉상 독립운동기념관 외곽에 설치된 선열의 불꽃 및 흉상은 선열들의 '조국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아 조성한 것입니다. 흉상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애족장 이상의 서훈자 서른여덟 분 중 서른 네 분(손경헌,손봉현,오학성,백운하 제외)과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 을강 전홍표,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서른 여섯 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전시공간1> * 삼천리 강산을 뒤덮은 태극기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만세운동은 신분, 지역,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여 연대감과 동질성이 확보되어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확산시켰고, 근대민족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100년 역사를 볼 때 3 ․ 1운동만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전 민족이 동참한 사건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만세운동은 밀양에서도 3월 13일 밀양면 장날만세운동을 필두로 8차례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을강 전홍표 선생의 지도와 윤치형 · 윤세주의 주동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밀양공립보통학교학생들의 만세운동(3월 14일), 유림의 만세운동(3월 15일), 안희원 장례행렬 만세운동 (3월 20일), 밀양소년단 만세운동(4월 2일), 단장 장날의 만세운동(4월 4일 ),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4월 6일), 청도면 인산리 만세운동(4월 1 0일) 등에서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사람은 28분이다. 특히, 밀양만세운동은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연대를 보여준 대표적 만세의거로 통일운동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전시공간2> * 살신성인으로 찾아가는 독립과 해방의 길 1 919년 11월 10일, 길림성 파호문 밖 평화로 57번지 반씨농가에서 결성된 의열단. 의열단은 외교론 보다는 무장투쟁노선에 의거한 독립투쟁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조선독립군정사 재정책임자 백민 황상규가 군대 조직과 운용에 소요될 인적 자원의 미비 및 현실적 난관 타개를 위해 소수정예의 결사대적 조직으로 운용될 행동대의 창설을 추진, 조카인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단한 것이다. <전시공간3> * 근대민족국가 건설을 향하여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을 계기로, 한인독립운동진영은 통합과 단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중국민 항일독립운동세력과의 국제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가을이래 의열단은 중국국민당정부의 도움을 받아, 중국 저장성(浙江省)일대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운영하여, 125명의 ‘청년투사’를 길러냈다. 김원봉이 교장이었고, 윤세주는 1기생으로 졸업한 다음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학교 졸업생으로는 이육사(1기), 정율성(2기) 등이 있다. 그리고 중국 내 모든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위한 노력 끝에 중국 내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민족혁명당이 창당(총서기 김원봉, 중앙상임위원회 서기부 윤세주)되었다. 김원봉과 윤세주가 이끄는 민족혁명당은 일제 말기 중국관내지역 한인독립운동을 주도한 핵심적인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전시공간4> * 중국항일전쟁의 최전선에 서서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개전 이후 그해 7월말에 북경과 천진, 11월에 상해, 12월에는 당시 수도였던 남경마저 함락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일제는 1938년 8월 하순부터 일본군의 중지나파견군(中支那派遣軍)이 9개 사단 30여만 병력으로 무한(武漢)공략전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무한 점령 공방전 속에 탄생된 것이 조선의용대 이다. 항일독립운동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인정받은 한인 최초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는 의열단계열이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일관되게 추구해갔던 무장투쟁노선과 그에 입각한 군대 창건의 준비, 아울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 인재육성과 실력양성이 그 기반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의열단을 중심으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벌여온 항일무력 건립운동 및 통일전선 결성운동의 주체적 노력과 중일전쟁 발발이라는 객관적 정세변화가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구대(박효삼), 2구대(이익성)와 본부대(총대장 김원봉)로 구성된 이 부대는 1939년 그 규모가 커지면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대로 개편되었다. 크고 작은 전투와 대적심리전에 주력하던 중 1941년 1월, 많은 대원들이 태항산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하였다. 1942년 일본군의 대규모 소탕전에 대응하여 '반소탕전'을 전개하던 중 석정 윤세주 열사가 피탄되어 순국하였다. 남아 있던 약산과 일부 병력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약산은 제1지대장, 부사령을 거쳐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한인군사조직에 의한 항일무장부대의 단초였으며, 군사상의 한중연합전선 구축의 토대였다. 또한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고 광복군의 인적자원을 풍부하게 만든 보충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일제에 항거했던 유일한 한인무장투쟁 세력의 원천이 바로 조선의용대 였다. < 전시공간5> *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예로부터 풍요와 넉넉함의 상징이었던 미리벌은 약탈과 수탈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품질 좋은 쌀은 일제 강도의 표적이 되엇고, 고율의 소작료와 수리세 등의 명목으로 빼았겼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리벌의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모두 일제에 대한 저항의 투지를 불태었다. 이 곳에는 교육과 사회운동, 소작쟁의, 노동쟁의, 동맹휴학 등 각 분야에서 하나로 뭉친 미리벌의 분노, 그리고 해방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전시공간 6> * 내일을 향해 흐르는 남천강 '해방 그리고 밀양 그 이후'라는 부제가 눈에 띄는 이 전시공간은 해방 이후 밀양으로 돌아온 약산 김원봉의 행적과 2001년 석정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밀양 지역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하는 과정, 최후의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의 밀양 방문을 통행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의 성지 ! 밀양을 다시 재조명하고 있다. 김학철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은 '밀양'을 자신들의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만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밀양'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삶을 돌아보는 곳이다. ▶ 문의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경남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 ○ TEL : 055-359-6060, 055-359-5687 ○ FAX : 055-359-5735 ○ EMAIL : jsseul@korea.kr ○ SITE : http://www.miryang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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